그림으로 말하는 작가 데이비드 위즈너(David Wiesner)
“What is a picture book?” UCLA에서 그림책 수업을 시작하고 제일 먼저 받은 질문이다. 말 그대로, 그림책이란 무엇이냐는 것. 간단한 질문이지만.. 늘 그렇듯 이런 질문에 답하기가 더 어렵다.
그동안 그림책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아이들이 읽는 책’이라는 생각, 나아가 ‘그림’ 과 ‘글’이 함께 있는 책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알게 된 건 마치 이 세상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의 피부, 눈, 머리색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림책 또한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고 ‘이것 뿐이 그림책이다’라고 단정지어버릴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파면 팔수록 다양한 그림책의 세계. 오늘은 그림책 중에서도 글이 없는, 그러니까 ‘그림만 있는 그림책’을 들여다볼까 한다. 영어로는 wordless picture books라고 불리는 이 책들은 온전히 그림만으로 서사를 완성해 내는데, 오히려 글이 없기 때문에 더 몰입감 있는 경험까지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림책에 글이 사라지면 비주얼 스토리텔링을 하는 작가의 역량이 굉장히 중요해진다. 장면의 구성, 시선의 흐름, 페이지 전환의 리듬까지 모두 그림 안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 없는 그림책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하게 되는 작가가 있다. 바로 미국 그림책의 거장, 데이비드 위즈너(David Wiesner)다.
미국 그림책 거장, 데이비드 위즈너(David Wiesner)
처음 데이비드 위즈너를 알게 된 건 동료 수강생 덕분이었다. 그림책 수업에선 매 주 온라인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서로 의견을 주고 받는 일종의 critique(비평) 활동이 이어진다. 첫 주에는 각자 좋아하는 그림책을 소개하고 왜 좋아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을 써서 올려야 했는데. 주륵 다른 수강생들의 글을 읽다가, 누군가 데이비드 위즈너의 Flotsam을 추천한다는 쓴 걸 보게 되었다.
위즈너? 뭔가 이름이 익숙해서 멈칫했다. ‘이 사람 내가 빌려온 책 쓴 작가 같은데?’ 거실에 나가보니 마침 내가 그 주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데이비드 위즈너의 Tuesday 였다.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이 누군가의 ‘인생 그림책’이라는 말을 들으니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궁금해졌다. 결국 다시 도서관에 가서 추천받은 Flotsam과 함께 꽂혀있던 TheThreePigs까지 집에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돌이켜보면 위즈너의 그림책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 건, 꽤나 우연같은 일이었다.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RISD)을 졸업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커리어를 시작한 데이비드 위즈너는, 자신이 기획부터 일러스트레이팅까지 진행한 책인 Tuesday(1992), TheThreePigs(2002), Flotsam(2007)으로 한 번 받기도 어려운 칼데콧 메달을 무려 세 차례나 수상한 3관왕이다. 한국에서도 그림 전시를 했다고도 알고있다.
위즈너의 그림책들은 평범한 주택가, 전래동화 속 한 장면처럼 익숙한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곧 개구리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놀라운 일들이 이어진다. 일상의 공간 속 사부작 뿌려진 판타지 같달까. 이처럼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무너지며 그의 이야기는 예측할 수 없는 결말로 이어진다.
위즈너의 책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수채화와 색연필로 사진을 ‘그려낸’ 듯한 그림체는 굉장히 세밀하면서도 따뜻하다. 거기에 앵글은 파격적이고 장면 전환은 과감하다. 그림 속 작가가 여기저기 숨겨놓은 깨알 디테일을 찾아내는 것도 재미다. 읽을 때마다 그림 속 새로운 스팟을 발견하기에 같은 책을 몇 번을 읽어도 지루할 틈이 없다.

상상력과 몰입의 힘, 비주얼 감각을 기를 수 있는 ‘글이 없는 그림책’
스토리텔러이기 전에 일러스트레이터였기에, 위즈너의 책들에 글이 거의 없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 그림만으로 이루어진 그림책은 분명 색다른 경험을 만들어낸다. 나 역시 그의 작품을 읽으며 글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렬해지는 몇 가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스스로 상황을 유추하고 해석하는 힘이 생긴다. ‘A는 B를 하는 것일까?’ ‘A는 왜 B를 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일까?’ 작가가 글로 정답을 주지 않으니 읽는 내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캐릭터의 표정이나 작은 단서들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이어 붙인다. 나만의 답을 만들어 간다. 어쩌면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사람과 바디랭귀지로 대화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말 대신 눈빛과 몸짓을 읽어내며 공감과 상상력을 동원한다.
장면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위즈너의 그림책 페이지를 넘기는 아이가 그림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집중한다. 글이 없기에 느끼는 몰입감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 씬 안에 온전히 들어갈 수 있는 여백이 생긴다. 마치 미술관에서 하나의 작품을 보듯, 온전히 그림에 집중할 수 있다.
비주얼 스토리텔링 감각이 생긴다. 예전에 광고 회사를 다닐 때 촬영 전 꼭 ‘콘티작업’이라는 걸 했다. 영화의 스토리보드 같은 건데, 촬영할 씬들을 페이지 위에 펼쳐서 플롯을 설명해 주는 일종의 비주얼 스토리텔링 장치. 글 없는 그림책은 이 콘티와 비슷하다. 시선이 그림을 따라가며 머릿속에서 다이내믹한 영상이 그려진다. 콘티를 많이 보는 훈련을 하면 말하면서 머릿속에 장면을 그려내는데(내가 그 훈련의 수혜자였기에 이건 연습하면 되는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쩌면 글 없는 그림책은 어쩌면 ‘비주얼 스토리텔링 훈련서’가 아닐지.

위즈너의 어떤 작품부터 시작해볼까?
내가 가장 좋았던 데이비드 위즈너의 책 세 권을 소개한다. 모두 칼데콧 메달을 수상한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데, 위즈너의 세계관과 스타일을 이해할 수 있는 명작들이다.
1. Tuesday (1991) by David WiesneR
“우리가 자는 사이, 개구리들이 하늘을 날아다닌다면?”
미국의 평범한 주택가. 밤이 어두워지자 개구리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모험을 펼치기 시작한다. 세밀하고 사실적인 그림체는 이 황당한 설정이 놀랍도록 설들력있게 느껴지게 한다. 판타지와 일상의 경계에 잇는 위즈너 특유의 스타일을 이해할 수 있는 입문서 같은 작품.

2. The Three Pigs (2001) by David Wiesner
전통적인 스토리라인을 깨 버린 어찌 보면 ‘발칙한’ 책. 돼지 삼형제는 늑대에게 먹히는 기존의 내러티브를 거부하고 여러 그림책 세상을 넘나들며 자신들의 모험을 펼친다. 자신의 운명을 캐릭터 스스로가 결정해가는 것이다. 이로서 캐릭터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닌 서사를 직접 만들어가는 주체가 된다.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를 좋아한 독자라면 어딘가 비슷한 결을 느낄지도 모른다. 스토리 속 인물들에게도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과 어쩌면 나도 어딘가의 이야기 속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책.

3. Flotsam (2006) by David Wiesner
바닷가에서 발견한 오래된 카메라. 인화된 사진 속 바닷속 세계. 그리고 비밀을 공유하는 아이들. 이렇게 복잡하고 서사가 있는 이야기를 그림만으로 끌어간다. Tuesday가 비주얼을 강조하는 작품이라면 Flotsam은 스토리와 비주얼을 모두 잡았다고 해야 할까. 그림만으로도 이렇게 깊이있는 메시지를 표현해내는 작가의 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카메라는 바다로 던져지고 마법 같던 사진들 모두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리기에 노스탤직한 여운이 오래 남는다. 공간과 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연결까지 품고 있는 작품.

글이 없는 그림책의 가능성을 보여준 위즈너. 미국에는 coffee table books라는 말이 있다. 거실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가 낮에 한 번씩 펼쳐 보는 책인데, 읽어도 읽어도 질리지 않으면서 아트 북 같은 느낌을 주는 위즈너의 책들은 우리 집의 coffee table book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