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보면 나를 책의 세상으로 처음 들인 건 그림책이다
AI가 사람처럼 글을 찍어내는 요즘. 나는 책의 세상으로 빠져가고 있다. 정확히는 그림책. 책이라는 medium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카피를 큐레이션하는 책을 쓰면서다. 어느 날 편집자님으로부터 영어 명카피를 소개하는 책을 써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았고, 늘 책이라는 걸 한 번 써보고 싶었기에 해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많은 새벽을 지새워 가며 쓴 <영어 명카피 핸드북>이 출간된 후…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책을 좀 더 사랑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맘 같아서는 책을 한 보따리 싸서 며칠 호캉스 같은 걸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일단 남편은 급히 쳐내야 하는 일로 ‘똥줄’이라는 것을 (^^;) 타고 있었고. 그동안 내가 바쁠 때 아이를 많이 돌봐준 감사함 때문이라도 남편이 일할 시간을 줘야 했다. 그렇다면 풀타임 보육자인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아이가 잘 때뿐인데.. 쉽지가 않은 게 일단 현생.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내가 매일같이 읽는 책이 있었으니 바로 그림책이었다. 눈 뜨자마자 “땍(책)!” “뚀(또)!” 소리치는 아이 덕분에 그림책과 아침을 시작했고. 집 근처 듬직한 페어팩스(Fairfax) 라이브러리, 코리아타운의 피오피코(Pio Pico) 라이브러리, 엘에이 부촌 클라스를 제대로 보여주는 베벌리힐스(Beverly Hills) 라이브러리를 돌아다니며 낮 시간을 보냈다. 좋은 그림책을 고르는 눈을 키우고 싶어 UCLA의 그림책 수업을 들으며 다양한 그림책도 접했다.
어느새 우리 집 안방의 흔들의자는 아이와 책을 읽는 지정 의자가 되었다. “땍!” “땍!” 어김없이 책 몇 권을 들고 뒤뚱거리며 걸어오는 아이. “책 읽을까?” “우(응)” 일인석 흔들의자에 둘이 낑겨 앉는다. 어려서는 우리 엄마가 내게 읽어 주던 그림책이다. 이제는 서른 중반이 된 내가 딸에게 읽어 주고 있는 돌고 도는 그림책 유니버스. 종종 이 친구는 책 내용이 뭔지는 아는 걸까 싶지만. 아이들은 그저 엄마가 자기를 위해 뭔가를 읽어 주는 그 ‘시간’이 좋은 거라고, 누군가 말해 줬던 생각을 한다.
매일 나는 그림책을 읽어주고, 누군가 읽어주는 걸 관찰하고, 또 내가 따라 읽었다. 책을 읽고 싶다는 갈증을 그림책으로 풀었다. 어쩌면 책을 좋아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에게, 그림책이라는 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들며 나는 글은 글대로 읽고 그림은 그림대로 따로, 그러니까 티비나 영화로 봐 왔다. 물론 ‘그림’과 ‘글’이 하나인 만화책은 계속 읽었지만 다른 장르라고 치면 말이다. 그런데 이제 아이에게 읽어주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림책이 다시 보인다. 어린 아이들만 읽는게 아니라 어른도 충분히 좋아할 수 있다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 절대 ‘쉬운’ 책은 아니다.
- 그림책은 짧다. 그림책은 아이들의 집중 시간을 고려해야 하기에 길어질 수 없다. 그래서 불필요한 문장을 모두 덜어내고 가장 에센셜한 말만 남긴다. 어찌보면 원석을 깎아내고 깎아내어 마지막 결정만 남긴 것 같은 문장들로 이루어져있다. 글이 단순해보이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다.
- 마음속 울림을 남긴다. 그림책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하고 분명하게 인생 교훈을 남긴다. 마치 광고 카피가 물건을 파는 것처럼, 그림책도 무언가를 판다. 감정, 태도, 관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같은 것들을. 이런 그림책 속 메시지들은 분명 조금 더 삶을 희망차고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는 생각을 한다.
-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된다. 한 권의 그림책은 한 권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아트 피스가 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소리내어 읽어주는 것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그림책. 시처럼 운율을 살린 텍스트를 소리내어 읽으면 귀가 즐겁고, 아름답게 펼쳐진 그림을 보다보면 눈이 즐겁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맞는 말이지만 무언가에 푹 빠져버리는 데도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을 한다. 타이밍을 무시하면 뭔가 뒤틀린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인정하려고 한다. 지금 나의 타이밍은, 그림책을 딸과 함께 읽어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것. 그리고 비록 내가 그렸던 모습은 아니더라도 그게 지금 나의 삶이라면. 내게 주어진 이 시간에 딥 다이브를 해 보겠다고. 당분간은 그림책의 세상 속에 살면서, 아이를 꼭 안고 그림책을 함께 읽는 행복감에 빠져 보겠다고 다짐한다.

퍼시픽워드샵 책 <영어 명카피 핸드북(길벗)>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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